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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문학 (4)] 고수는 하수에게 배운다

기사승인 2018.06.22  13: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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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천주(孔子穿珠)=공자가 시골 아낙에게서 배운 지혜로 구슬을 꿰다. 천하의 공자도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에게든 가르치려고 든다. 하수에게도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고수다.

 

“내 귀가 나를 만들었다.”

정복자 칭기즈칸의 말이다. 그는 배운 게 없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몰랐다. 하지만 항상 귀를 열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견문을 넓혀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배움은 교실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수는 늘 귀를 열어놓고 누구에게든 배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공자는 일곱 살짜리 꼬마를 스승으로 삼기도 했다.

 

공자와 제자 일행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길 한복판에서 꼬마들이 흙으로 성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부가 길을 비키라고 외치니 꼬마들이 일제히 몸을 피했는데, 웬 꼬마 하나만은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서서 당당하게 말했다.

“수레가 성을 비켜야지, 어떻게 성이 수레를 비킨다는 말입니까?”

하도 대견해서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고, 나이가 몇 살이냐?”

“제 이름은 항탁(項橐)이고, 나이는 일곱 살이옵니다.”

이번에는 그 꼬마가 공자에게 당돌하게 물었다.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물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무엇입니까? 또 연기가 나지 않는 불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나뭇잎 없는 나무와 줄기가 없는 꽃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귀찮아하지 않고 찬찬히 가르쳐줬다.

“물에는 물고기가 살고,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는 법이다. 나뭇잎이 없으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며, 줄기가 없으면 꽃이 피지 못하는 게 자연의 이치란다.”

꼬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우물 속의 물에 어디 물고기가 삽니까? 반딧불도 불이지만 어디 연기가 납니까? 고목나무는 나뭇잎이 없어도 다들 나무라고 부르지요. 또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송이에는 줄기가 없지 않습니까?”

감탄한 공자가 말했다.

“참으로 비범한 소년이로다. 나이는 어리지만 너는 내 스승이구나!”

 

일곱 살짜리 꼬마에게 공자가 한 수 배웠다. 배움은 위로부터만 오는 게 아니다. 마음을 열면 아랫사람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말했다.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공자는 일곱 살짜리 소년만을 스승으로 삼은 게 아니다. 배움을 얻기 위해서라면 미천한 시골 아낙네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공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어떤 사람한테서 진귀한 구슬을 얻었다. 그런데 구슬의 구멍이 아홉 구비로 구부러져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실을 꿸 수가 없었다. 때마침 가까이에 있는 뽕밭에서 뽕을 따는 여인을 보고는 혹시 방법이 없는지 묻자, 여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꿀단지를 놓고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여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공자는 무릎을 탁 쳤다. 공자는 개미 한 마리를 붙잡아 허리에 실을 묶고는 구슬의 반대쪽 구멍에 꿀을 발라 놓았다. 잠시 뒤 구멍을 통과한 개미가 기어 나왔다. 시골 아낙네가 천하의 공자에게 한 수 가르쳐준 것이다. ‘공자천주(孔子穿珠)’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됐다.

 

배움은 나이나 신분과 상관이 없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어린 아이라고 깔봐도 안 되고, 시골 아낙네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허름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뜻밖의 비범한 면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넓고 스승은 많다. 평생 배움을 구한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곤란에 처하여 배우는 사람은 그 밑이고, 곤란에 빠져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최하다.”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也)

 

타고난 성인(聖人)이 아닌 다음에는 늘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를 가리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했다. 맹자는 이 말을 받아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지(智)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인(仁)”이라고 풀이했다. 배우기를 즐기는 마음은 곧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맹자>에 이런 예화가 나온다.

 

춘추시대에 전설적인 바둑 고수로 혁추(奕秋)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량이 탁월해서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명성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바둑을 배우고 싶어 했다. 혁추는 그 중에서 두 사람을 골라 제자로 삼았다.

그런데 두 제자 중 하나는 온 마음으로 바둑을 배웠다. 스승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한 결과, 마침내 스승에 버금가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스승의 가르침을 건성으로 대했다. 겉으론 듣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만 가득했다. 그는 새 사냥을 좋아해서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바둑 공부를 하다가도 큰 기러기가 날아가는 걸 보면 ‘저 놈을 잡으려면 화살을 어떻게 쏴야 하지?’ 하고 한눈을 팔기 일쑤였다. 그러니 바둑 실력이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맹자는 혁추의 고사를 인용한 뒤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지혜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둑 실력은 큰 차이가 나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바둑은 작은 기예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을 모으고 뜻을 다하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더 그렇지 않겠는가?”

제자가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도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바둑을 예로 들어 왕을 꼬집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맹자와 같은 현인이 곁에 있음에도 왕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보고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이 나 같은 사람을 만나는 시간은 짧은 데 반해서 소인배들과 만나는 시간은 매우 기니 지혜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왕이 현인을 만나 마음을 다해 배워도 모자랄 판인데, 온갖 소인 잡배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지혜로워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면 천하의 고수에게 배워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를 얻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스승도 스승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세상에 스승이 아닌 사람이 없다. <서편제>의 배우 김명곤이 어느 글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을 연기하려면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대에서 절름발이 연기를 하자면 다리 저는 사람을 잘 관찰해서 절뚝절뚝 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전에 절름발이 역할을 맡았을 때, 나는 다리 저는 사람을 관찰하기 위해 종로2가 길거리로 나가 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으냐. 종로 바닥이 온통 다리 저는 사람 천지더라. 그때 큰 수 하나를 배웠다.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죄다 연기 스승이었다.”

배우려고 하니 사방에 스승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 많은 스승들이 평소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명곤의 경험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리 저는 시늉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니 더 이상 배울 게 없지 싶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거리로 나가니 이상하게도 다리 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서 멀어지니 눈에서도 멀어진 것이다. 그때 큰 수 하나를 또 배웠다. 즉, 보아야 보인다는 것이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보이고, 보려고 하면 보인다. 나는 연습 때마다 이 이야기를 단원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마음이 열리면 눈이 열리고, 마음이 닫히면 눈이 닫힌다. 배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스승이 보이고, 배우려는 마음이 없으면 스승이 안 보인다. 고수는 누구에게나 배우지만, 하수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한다. 고수한테는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이 있지만, 세상 넓은 줄 모르는 하수들한테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깨우친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골짜기보다 낮은 데 있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계곡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왕으로 군림한다. 공자가 일곱 살짜리 꼬마에게 배우고, 시골 아낙네에게도 물어서 성현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몸을 낮추는 것은 결국 자신을 높이는 길이다. 진정한 고수는 자세를 낮춰 누구에게든지 배움을 구한다. 반면에 하수는 교만이 넘쳐서 배울 줄을 모른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의 일화도 이를 보여준다. 열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그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산골의 이름 없는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 고을을 잘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은 삼가고, 착한 일은 많이 하면 됩니다.”

맹사성은 내심 실망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맹사성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했다. 마지못해 다시 앉자 스님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찻잔에 물이 차서 넘치는데도 스님은 따르기를 멈추지를 않았다.

“스님, 차가 잔에 넘치지 않습니까.”

맹사성이 소리치는데도 스님은 태연히 차를 따라 마침내 방바닥까지 젖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맹사성에게 스님이 한 마디 던졌다.

“찻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교만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죽비로 내리치는 듯한 한 마디였다. 이에 크게 뉘우친 맹사성은 마음을 갈고 닦아 마침내 청사에 빛나는 명재상이 되었다. 이름 없는 산골 스님이 맹사성에게는 큰 스승이었던 셈이다.

 

스승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이름 없는 그 스승들은 보고자 해야 보이고, 듣고자 해야 가르침이 들린다. 인생이라는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들고 싶은가?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여라. 고수는 길바닥의 개미에게서도 지혜를 배운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김태관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 kntimes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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